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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가옥은 영조(英祖)의 숙의 문씨 소생 화길옹주(1754~1772)의 부마 능성위 구민화의 주택이다. 영조가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시집가자 왕명으로 친히 나라에서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주었다고 해서 ‘궁집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.
이 가옥은 영조가 직접 나침반을 놓고 집터를 잡았다고 구전하고 있으며, 구현겸의 차자인 구민화가 화길옹주와 결혼하면서 이 가옥을 짓고 분가한 것으로 추정된다. 따라서 이 가옥은 화길옹주가 출가하여 죽을 때 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옥이 건립된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.
현재 안채 대청의 종도리 장혀에는 상량문이 남아있으나 퇴색되어 육안으로의 해독이 불가능하다. 적외선 촬영 등의 방법으로 상량문의 내용이 밝혀진다면 이 가옥의 정확한 연혁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.
이 가옥은 화길옹주 사후, 일제강점기 때까지 후손들이 거주하며 관리하였다. 일제강점기 때는 한때 후손들이 거주하지 않고 재실로만 사용하였다고 한다. 그 후 1972년에 현 소유주인 권옥연씨 부부가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. 이 가옥은 초창 이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증?개축이 지속되었을 것으로 사료되나,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. 현재 사랑채와‘□'자형의 안채만이 남아 있는데 그 규모가 31칸이다. 조선시대의 ‘가사규제’에 따르면, 옹주는 40칸으로 집의 규모가 규제되어 있었는데, 규모로 보아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행랑과 바깥문채가 대지의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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