설명 |
이 가옥의 창건년도와 규모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운조루 안채와 사랑채 종도리 묵서와 유이주가 68세 되던 해인 1793년에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던 기록인 분재기 《장자구처기(長子區處記)》를 들 수 있다. 큰사랑채 대청마루 종도리에는 ‘龍龍龍崇禎紀元後三丙申秋九月己巳十六日甲申戊辰時上樑龍龍’라고 쓴 묵서가 있다. 숭정기원후 세 번째 병신년은 1776년이다. 즉 큰사랑채는1776년 9월 16일에 상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. 안채 대청, 마루 종도리에도 '崇禎紀元後三丙申七月二十七日酉時上樑龍龍龍’라는 묵서가 있다.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묵서가 잘 보였었는데 최근 앞의 연호부분이 무엇인가에 마모되어 사라졌다. 이전에 촬영한 사진자료에 따르면 아무튼 안채도 사랑채와 같은 해인 1776년에 지어졌으며 사랑채보다 2개월 정도 빠른 7월 27일에 상량되었음을 알 수 있다. 즉 안채를 짓고 이어서 큰 사랑채가 차츰 상량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. 운조루가 지어지는 해보다 앞서 1770년대에는 운조루를 창건하기 위한 토지매입과 노비소유 등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.
또한 유제양(1846-1920)의 일기 《시언(是言)》에서는 지금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창건주 유이주가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《조성일기(造成日記)》를 인용하여 고조 유이주께서는 도면을 아들에게 주어 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시작한지 7년만인 병신년(1776)에 기와집 100여칸을 완성하였다고 기록하였다.
|